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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사회 : 왜 우리는 삶에서 고통을 추방하는가

13.d_dk 2021. 12. 1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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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사회 책 표지.

고통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과 정의

 보통 고통이라는 단어를 듣는다면 부정적인 것을 먼저 느낄 것이다. 나는 아픈 느낌을 먼저 받았다. 작은 상처가 나서 조금씩 따끔따끔한 것은 고통스럽다. 어떤 직장인은 일을 하는 도 중에 끝없는 회의에 갇혀 있는 것을 고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는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는 사람은 삶 자체를 고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고통들에 대하여 공포를 가지고 있다. 고통을 최대한 겪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조금만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최대한 만나지 않고 넘어가려고 한다.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시간을 날리며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이 없는 삶을 원한다. 이 책의 부제와 같이 왜 우리는 삶에서 고통을 추방하려고 할까? 이러한 고통에 대해 의심하고 생각해보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일까?

 신체 속에서 고통을 예시로 고통의 역할(?)을 생각해보자. 신체에서 고통이 느껴지는 경우 그 고통은 어떤 문제에 대한 경고이다. 과일을 칼로 깎다가 손을 베이는 경우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이는 신체의 입장에서 손이라고 하는 부분에 문제가 생겼음을 따가움 등의 고통으로 알려준다. 사람이 큰 병에 걸린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무릎 관절에 문제가 생긴 경우 걷기도 힘들 정도의 고통이 나타나기도 한다. 신체에서의 고통은 신체의 부분에 문제에 대한 경고이다.

 신체를 벗어난 사람의 입장에서도, 또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의 입장에서도,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경우 이는 문제에 대한 신호로 볼 수 있다. 직장에서 과도한 언어폭력으로 고통을 느끼는 경우 이는 직장이라는 사회 속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개인이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 고민하며 고통을 받는다면 이것은 그 개인에게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책의 역자는 고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어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음을
불쾌한 감각, 감정 등으로 알려주고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경고 신호"

 고통이라는 경고를 잘 느껴야만 문제를 잘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며 안락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려고 한다. 만약 고통이라는 신호가 부재한다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문제는 점점 심각해질 것이다.

 

고통에 대한 공포

 고통을 느끼고 잘 다루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을 하기 전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무서워하며 피하고 싶어 한다. 저자는 이를 '고통 공포'라고 부르며 고통에 대한 전반적인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두려움이 있는 것은 왜 두려운지 정확하게 알아보면 두렵지 않은 것이 되고는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작은 고통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고통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고통에 대한 내성이 약한 것이다. 또 이러한 회피들을 자주하면서 고통에 대한 만성 마취를 스스로 초래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운 대결을 초래하는 갈등과 논쟁을 갈수록 없앤다. '좋은 것이 좋다'라는 생각 아래 많은 고통들을 회피한다. 책에서는 이를 고통을 감내할 용기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부정적인 것이 없어진 긍정적인 것만이 남아있는 사회가 되어간다. 고통을 회피하고 고통에 무감각한 인간들은 행복한 사람이 된다.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 문제들은 결국 더 큰 문제를 만드는 상황을 초래하여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을 주게 된다. 이와 같이 고통을 밀어내고 숨긴 긍정 속있는 것을 긍정의 찌꺼기에 둘러싸인 사회와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책에서는 미국의 통증 전문가 데이비드 B. 모리스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아마도 고통 없는 삶을
일종의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처럼 생각하는 지구 상 첫 번째 세대에 속할 것이다."

 고통에 대한 공포는 동일한 것들의 지옥이 되며 현재의 상황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동일한 것들의 지옥이 되는 이유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같은 상황 속에서 계속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을 함으로써 다른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현대사회에서의 고통

 몸에 고통을 주어 인간을 다루는 고문사회에서 은밀하게 규율을 통해 정신적 고통을 주는 규율 사회로 넘어왔다. 이후 '행복'이라는 단어 아래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사회로 넘어오게 되었다. 현대사회인 성과사회에서 고통은 스스로 착취하며서 발생된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착취하며 발생된 고통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회피하려고 한다. 스스로를 착취하며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약한 것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약함은 부정적인 것이므로 감추고 피하려고 한다.

 이 부정적인 것들을 쉽게 회피할 수 있는 좋은 도구로 사회는 긍정심리학 마취제를 건넨다. '긍정적인 마인드'라는 이름 아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고통을 덮어버린다. '자아실현'이라는 이름 아래에 자신을 계속해서 착취한다. 결과적으로 덮혀져 버린 고통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며 흐릿한 만성적인 고통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사람들에게 우울을 만들어낸다. 고통을 느끼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회피하며 지속적으로 마취제(긍정심리학)를 사용하지만 몇몇 개인들은 우울이라는 대가를 얻는다. 동시에 다른 문제가, 더 큰 문제가 생성되기도 한다. 이러한 마취된 상황에서 우리는 문제가 있는 것을 모르는 채 행복하며 스스로 자유로운 것이라고 착각한다.

 개인의 입장이 아닌 사회의 입장에서의 고통도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에도 공포를 가지고 피하려고 한다. '싸우지 말자',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들로 마취하며 우리는 고통을 계속해서 모른 채 두려고 한다. 즉, 사회문제로써의 고통은 해결되지 못하고 더 큰 사회적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사회 속에서 타인과 타자에 대한 인식과 그로 인한 고통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안락함과 쾌적함이라는 이름 아래 타자는 거부되고 기피된다. 스스로만을 위해 온실 속에서 자기중심적이고 나르시시즘적으로 닫힌 공간으로서의 개인은 개인 서로의 공감과 연대가 없다. 이러한 사회는 진통 사회이다.

 책의 역자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안락함이 목적일 때,
우리는 경험의 확장도,
세계에 대한 인식도 깊이도,
이질적인 타인에 대한 공감도 원하지 않는다."

 

변화와 발전을 위한 촉매로서의 고통

 고통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고통을 제대로 바라보고 달라져야 함을 결심해야 한다. 이 결심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을 함으로써 우리는 변화와 발전을 할 수 있다. 변화와 발전 속에서 우리의 정신과 스스로는 성장하며 삶에 의미를 찾아간다. 편안함과 안락함만을 찾고 고통을 밀어낼 때 삶은 편안한 생존을 위해 희생된다. 고통을 느끼고 변화와 발전을 시도함으로써 얻는 삶의 생명력을 버리고 편안한 생존을 추구하는 게 요즘의 사회이다. 고통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새로운 관점을 열어야 한다. 긍정적인 것, 고통에 공포를 가지고 회피하고 밀어내게 되면 같은 것이 재생산된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영원히 파괴하는 자이며 영원히 창조되는 자가 될 수 있다.

 

삶을 위한 고통

 삶이란 무엇일까? 옳은 일을 하고 다른 생명을 도우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어떤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삶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다. 그러한 상황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으며 의미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인터넷 상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임 속에 행복한 상황 속에 영원히 갇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고통이라는 지각 기관을 통해 스스로를 찾아가며 타인과 부딪히며 자신을 찾아야 한다.

 오로지 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고통 없는 삶은 인간적인 삶이 아니다. 그 어떤 것보다 편안함과 안락함 그리고 행복만이 추구될 때 인간은 죽기에는 너무 살아있고 살아있기에는 너무 죽은 좀비 같은 존재가 된다. 책에서는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인간은 불멸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삶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책 속 챕터별 메모 및 문구 정리

이 책은 조금 어려운데 쉽게 읽기 위해서는 뒷부분의 역자가 정리한 부분을 먼저 접하고 책을 읽으면 좋다. 또 사이사이 메모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글을 정리하고 이 책의 내용을 다시 보면 볼수록 결국의 책의 내용이 가장 많은 부분을 전달해주고, 우리에게 인사이트를 고통을 준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생각이 날 때 혹은 다른 누군가가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책의 내용에 대한 문구와 나의 생각을 정리해두려고 한다.

 

고통 공포
  • 에른스트 : 네가 고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라. 그럼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 우리가 고통과 맺고 있는 사회관계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 고통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암호
  • 고통 공포(algophobie) : 고통에 대한 전반적인 두려움이 지배
  • 고통에 대한 내성도 약해짐; 고통에 대한 만성 마취를 초래; 고통스러운 대결을 초래하는 갈등과 논쟁은 갈수록 없어짐
  • 대안의 부재라는 이름의 중도, 고통을 감내할 용기가 없어짐; '좋게 좋게 가자!'
  • 부정이 없어진 사회; 긍정만이 최고인 사회; 고통에 무감각한 인간을 만들어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의 문제
  • 미국의 통증 전문가 데이비드 B. 모리스;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아마도 고통 없는 삶을 일종의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처럼 생각하는 지구 상 첫 번째 세대에 속할 것이다.
  • 좋아요의 사회; 고통이 정화한다는 사실이 잊히며 카타르시스는 없음; 긍정의 찌꺼기에 둘러싸인 사회
  • 문화의 경제화 및 안락화로 인한 만족을 추구하는 예술들 ... 소비를 고려한 예술들
  • 타자에 의해 건드려지는. 감각은 고통. 이것 없이는 동일한 것들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음
행복 강요
  • 고문 사회 : 몸에 고통을 주는 사회
  • 규율 사회 : 은밀하게 정신적 고통을 이용하는 사회
  • 규율 : 인간이 고통과의 접촉을 유지하도록 하는 형식; 멋진 노동자
  • 고통 속에서 더 많은 웃음을 발견해낼 수 있는 사람일수록 깊이가 있음; 영웅적 세계관
  • 더 높은 목적과 관련 없이 자신에게 만족하고 자신을 향유하는 쾌락주의적인 몸은 훈육된 몸과는 반대로 고통에 대해 거부하는 태도를 취한다.
  • 행복하라 : 새로운 지배 공식
  • 행복의 긍정성이 고통의 부정성을 밀어낸다.
  • 행복은 긍정적인 감정 자본 : 자기 동기부여와 자기 최적화, 신자유주의적 행복 장치가 잘 동작하도록 도움
  • 큰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지배
  • 예속된 자는 자신이 예속된 것 자체를 모르며 자유로운 줄 알고 있음
  • 자아실현이라는 이름 아래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
  • 자유 로우라는 말은 복종하라는 말보다 더 파괴적인 강제를 만듦
  • 우리는 우리의 욕구와 소망, 취향을 알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도록 요구 받음
  • 전면적인 소통 내부의 전면적인 감시
  • 자유와 감시는 구별할 수 없음
  • 긍정심리학은 혁명의 종언을 확정 짓는다.
  • 혁명가들이 아니라 동기부여 트레이너들이 무대에 올라 어떤 불만도, 나아가 어떤 분노도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 행복 장치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사회의 탈정치화와 탈연 대화를 초래한다.
  • 각자가 행복을 추구 고통은 개인적인 실패; 혁명 대신 우울
  • 함께 느끼는 고통이 혁명의 효소다.
  • 개인의 피로와 우리의 피로는 구분되어야 한다.
  • 행복의 특징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 행복에는 부정성이 내재한다.
  • 진정한 행복은 균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 고통이야말로 행복이 사물화 되는 것을 막아준다.
  • 고통은 지속적인 행복이 가능하게 한다.
  • 고통이 행복을 지탱한다.
  • 격정은 행복과 고통을 결합한다.
  • 서로 결합하여 크게 자라거나 서로 결합하여 작게 남아있는 형제이며 쌍둥이이다. (니체가 바라보는 고통과 행복)
  •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깊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생존
  • 바이러스는 사회를 비투는 거울이며 우리 사회는 영구적인 전쟁상태에 있는 것 같은 생존사회이다.
  • 바이러스는 고통이 억제된 안락 영역으로 침투하여 이 영역을 삶이 생존으로 완전히 얼어붙는 격리공간으로 바꾼다.
  • 생존사회는 좋은 삶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 생존의 히스테리는 삶을 근본적으로 덧없는 것으로 만든다.
  • 삶은 형이상학적 차원을 모조리 빼앗기며 측정할 수 있는 것, 셀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 자본주의에는 좋은 삶에 대한 서사가 없다.
  • 자본은 생존을 위한 재산으로 상상된다.
  • 생존을 위한 투쟁은 좋은 삶을 위한 염려와 대립한다.
  • 생존의 히스테리에 지배되는 사회는 좀비의 사회다.
  • 우리는 죽기에는 너무 살아있고 살아 잇기에는 너무 죽었다.
  • 진통 사회는 긍정성의 사회다.
  • 이 사회의 특징은 무한한 허용성이다.
  • 다양성과 커뮤니티 혹은 공유가 이 사회의 구호들이다.
  • 적으로서 타자는 지워진다.
  • 타자에 대한 면역방어가 없이 빠른 속도로 정보와 자본은 순환된다.
고통의 무의미함
  • 오늘날 고통 경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고통이 무의미한 것으로 지각된다는 것
  • 고통 앞에서 우리를 지탱해주고 방향을 제시해 줄 의미 연관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는 고통을 감내하는 기술을 완전히 상실했다.
  • 오늘날의 고통은 오로지 육체적이기만 한 고통으로 사물화 되었다.
  • 고통의 의미 상실은 생물학적 과정으로 축소된 우리의 삶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음을 암시
  • 고통이 의미를 지니려면 삶의 의미 지평 안으로 편입시키는 서사가 먼저 있어야 한다.
  •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 의미를 상실한 벌거벗은 삶 속에서만 의미를 상실한다.
  • 고통이 비로소 이야기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 고통은 실제로 배가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
  • 탈서사적 시대, 계산이 우리의 삶을 규정
  • 정신이 자신의 무력함을 선언하는 고통의 한계선은 오늘날 빠르게 낮아지고 있다.
  • 서사 능력으로서 정신은 자신을 빠르게 철거하고 잇다
  • 우리의 고통 신경은 더 민감해지는 듯하다. (과민성이 자라난다)
고통의 간지
  • 고통은 사라지게 할 수 없는 기본적인 힘
  • 평균적인 안락함을 위해 고통을 가장자리로 밀어냄으로써 만들어진 편안함
  • 인간을 기본적인 힘들로부터 지켜주는 둑이 높아질수록 위험도 커진다.
  • 지금은 인간은 어느 때보다도 다치기 쉬운 상황
  • 고통이 억압되면 한 곳에 축적되어 보이지 않는 자본; 이자와 이자의 이자를 통해 증식
  • 우리는 편안함이 넓게 펼쳐진 상태를 보게 된다면 짐을 짊어지고 있는 곳은 어디냐고 곧장 물어볼 수 있다.
  • 가장자리로 밀려난 고통이 고통 적대적인 진통 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다.
  • 치유하는 돌봄을 어루만짐과 말 걸기의 느낌으로 경험하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 만성적 고통이 견딜 수 없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사회가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 만성적 고통은 의미를 상실한 우리 사회를 우리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시대를 반영한다.
진실로서의 고통
  • 진실만이 고통을 준다.
  • 모든 진실은 고통스럽다.
  • 진통 사회는 진실 없는 사회이며 같은 것의 지옥이다.
  •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도 살지도 않은 것이다.
  • 삶은 편안한 생존을 위해 희생된다.
  • 고통은 결속이다. 모든 고통스러운 상태를 거부하는 사람은 결속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고통을 줄 수 있는 깊은 관계를 피한다.
  • 고통은 차이다. 고통은 삶을 분절화하여 표현한다. (신체 기관을 고통을 바탕으로 인지) 고통이 없다면 구별에 근거하는 가치 평가가 불가능해진다. 고통 없는 세상은 같은 것의 지옥이다. 이런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차별성이며, 이런 새성은 독특함을 소멸시킨다.
  • 고통은 현실이다. 고통을 주는 저항이 있을 때 현실을 자각한다. 진통 사회에서 지속적 마취는 세계를 탈현실화한다.
  • 고통은 자기 지각을 강화한다. 이런 지각을 바탕으로 자신을 확인하고 느낀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러한 고통이 사라지면 고통을 대체할 강렬한 자극을 찾게 된다. (극단주의자)
고통의 시학
  • 진통 사회의 특징은 생의 감정이 매우 빈약해졌다는 것이다. 삶은 약화되어 안락한 생존이 된다.
  • 좋아요는 소통을 가속화; 고통은 반대; 침묵하는 경향이 있음; 이는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는 것을 허용해준다.
  • 고통은 새로운 것의 산파이자 완전히 다른 것의 조산사
  • 고통의 부정성이 같은 것을 중단시킨다.
고통의 변증법
  • 정신은 고통이다. 정신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새로운 인식에 더 높은 앎과 의식의 형태에 도달한다. 정신은 형성과정에서 자신과의 모순에 빠진다. 정신은 분열된다. 이 분열, 이 모순은 고통을 준다. 고통은 정신이 자신을 형성하도록 이끈다.
  • 고통은 정신을 변환시킨다. 형성의 길은 고통의 길
  • 고통의 부정성만이 정신을 살아 있게 해 준다. 고통이 삶이다.
  • 고통을 감수하고 치르는 것이 경험의 한 계기; 이 점에서 경험은 상태의 어떤 변화도 낳지 않는 체험과는 다름
  • 진통 사회는 체험의 연속
  • 고통은 정신이 더 잘 볼 수 있게 한다. 고통은 전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연다.
  • 긍정적인 것을 고수하면 같은 것이 재생산된다.
  • 영원히 파괴해야만 하는 자로써 영원히 창조하는 자
고통의 존재론
  • 존재를 거쳐 고통의 본질로 파고든다.
  •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인간의 현존을 기분으로 규정하고 기분으로 조율하는 저 소리 없는 목소리는 전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 목소리는 다른 곳으로부터, 완전한 타자로부터 온다.
  • 존재는 오로지 고통 속에서만 멂 속에 머물러 있는 순수한 가까움을 들을 수 있다. 고통은 인간이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그에게 멈출 곳과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제공해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해 준다. 고통은 인간의 현존재를 떠받쳐준다. 이점에서 고통은 쾌감과 다르다. 고통은 벗어날 수 있는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은 인간 현존재의 중력을 형성한다.
  •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를 아우라를 나아가 향기를 잃는다.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은 타자의 다름, 즉, 타자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타자성은 마음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다.
  • 고통은 오늘날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지각 기관
고통의 윤리학
  • 여러 미디어를 통해 우리의 고통에 대한 감각을 무뎌지게 함; 폭력의 포르노에 노출됨
  • 대중매체와 네트워크에서 과도하게 등장하는 고통과 폭력의 영상들 또한 우리가 침묵하는 관객의 수동성과 무관심성에 빠져들도록 강요한다.
  • 수전 손택; 그 그림은 말한다. 그것이 끝나게 하라, 개입하라, 행동하라.
  • 집중적인 관심과 당혹감이 있어야 행동이 일어날 수 있게 때문
  • 갈수록 공감이 상실되어 가는 것은 타자의 소멸이라는 근본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진통 사회는 고통으로서의 타자를 제거한다. 타자는 대상으로 사물화 된다. 대상이 된 타자는 고통을 주지 않는다.
  •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자아에 의해 지배된고 포획되고 심지어 도취되어 있다.
  • 디지털 매체들은 타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타자의 저항을 약화한다.
  • 갈수록 우리는 타자의 다름을 지각할 능력을 잃어간다.
  • 타자가 다름을 빼앗기면 그 타자는 오로지 소비될 수 있을 뿐
  • 타자에 대한 감수성은 고통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노출하는 노출됨을 전제로 한다.
  • 연민보다도 더 앞에 놓여있는 노출됨의 고통은 자신으로의 안락한 복귀를, 자신 안에서의 만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할 수 있음이 절대화되면 타자는 파괴된다.
  • 이 타인으로 인한 두려움을 통해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 타자로 인한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도 전혀 접근할 수 없다.
마지막 인간
  • 우월 욕망 : 우월함과 명성과 명예를 향한, 영웅적인 것으로 고양된 추구가 인간에게 본질적이라는 인간학적 가정
  •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서는 강해지는 대등 욕망, 동등함의 추구뿐만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함을 향한 강화된 추구로 인해 우월 욕망이 약해진다. 중국과 같이 전체주의적 정권에서도 마지막 인간은 나타난다.
  • 어디서나 영웅주의는 쾌락주의에 밀려난다.
  • 우리는 대기를 마취의 기운으로 가득 채우는 몽롱하고 고통이 없으며 기이하게 이완된 편안함을 감지한다 … 재인들은 마찰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충만한 안락함을 발견한다 … 이 모든 것들이 오직 환하게 비추고 따듯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즐겁게 하고 황금의 강을 끌어오기 위해 만들어진 듯하다.
  • 생존사회로서의 진통 사회는 반드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전제하지는 않는다. 팬데믹에 직면하여 우리는 생명 정치적 감시 권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 전체주의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디지털 감시 권력은 이미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념을 궤멸시키고 있다. 인간의 인격이 이윤을 낳는 데이터 기록으로 강등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감시 자본주의로 바뀌고 있다. 감시는 자본을 낳는다. 우리는 디지털 플랫폼들에 의해 상시적으로 감시되고 조종된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도가 선별되고 착취된다.
  • 지배는 자유와 일치하는 순간 완성된다. … 자유의 표현인 무한한 소통이 총체적 감시로 변한다.
  • 마지막 인간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다. 그는 자유보다 안락함을 더 높은 가치로 간주한다.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념을 궤멸시키는 디지털 심리 정치는 마지막 인간의 평안함을 방해하지 않는다. 마지막 인간의 건강 히스테리는 그가 자신을 영구적으로 감시하도록 한다. 그는 자기 안에 내면의 독재를 내면의 통제 정권을 구축한다. 내면의 독재가 생명 정치적 감시와 일치할 때 이 감시는 더 이상 억압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감시가 건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지막 인간은 생명 정치적 정권하에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낀다. 지배와 자유가 여기서 다시 일치에 도달한다.
  • 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고통 없는 삶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의 부정성을 억압하고 내쫓는 삶은 스스로를 제거한다. 죽음과 고통은 서로 땔 수 없다. 고통 속에서 죽음이 선취된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자는 죽음 또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이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좀비의 삶이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철폐한다. 인간은 불멸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삶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역자 후기
  • 고통이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어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음을 불쾌한 감각, 감정 등으로 알려주고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경고 신호라고 정의
  • 이 경고가 적절히 작동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동을 확실히 낳으려면 고통은 분명히 느껴지고 의식되어야 함
  • 고통이라는 신호의 부재 = 문제가 심각해 짐
  • 고문 - 규율 - 성과 ... 인간의 고통 변화
  • 성과 사회 속 우리는 스스로 착취하면서 이로 인한 고통을 부정, 회피
  • 고통은 건강을 위한 필수 기능
  • 고통을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 - 회피 - 작은 고통에도 민감하게 반응 - 악순환의 반복
  • 고통을 회피하는 것은 의학 기술이 담당
  • 긍정심리학을 통한 심리 조작 -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고통을 덮어버림
  • 고통의 원인을 모두 개인에게서 찾음; 사회에서 유래된 고통도 있음
  • 사회적 갈등이나 대결은 일반적인 고통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임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대결 자체를 악으로 보고 그것들을 억압하면 그것들을 초래한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고 갈수록 심화된다
  • 긍정심리학 - 고통 완전 제거 불가 - 전면적인 고통을 흐릿한 만성적인 고통으로 바꾸며 이는 우울을 만듦
  • 우리는 문제의 징후인 고통을 회피하고 안락함과 쾌적함을 직접 추구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에서 멀어진다. 안락함과 쾌적함은 익숙한 것 안에 머물 때 가능하며, 이질적이거나 낯선 것은 내게 익숙하지 않기에 거부된다. 사회 안에서는 이질적인 경험과 특성을 지닌 개인 및 집단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타자들"은 나의 안락함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거부되고 기피된다. 안락함이 목적일 때, 우리는 경험의 확장도, 세계에 대한 인식도 깊이도, 이질적인 타인에 대한 공감도 원하지 않는다. 안락함의 온실 속에 머물면서 바깥세상이 온실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지 않기를 원할 뿐이다... 온실에 머무르려는 욕망은 개인들을 자기중심적이고 나르시시즘적으로 닫힌 공간 안에 고립시키고 개인들 사이의 공감과 연대를 막으며, 이로써 사회 변화의 동력을 억압한다.
  • 팬데믹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낳고, 우리의 관심을 생존에 집중시킨다 ... 생존만 하면 모든 것이 괜찮은가? 삶의 의미는? 아니다 살아남아야 의미도 찾는다?
  • 현실에서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변화는 새로운 문제를 낳고,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고통을 낳기 마련이다. 따라서 고통도 예술도 삶의 지속적인 동반자이며, 지속적인 변화의 동력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실제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주목함으써 그 문제를 고발하고 해결을 요구한다.
    개인들이 소마라는 알약을 복용하게 함으로써 현실과 무관한 행복감에 젖어 살아가게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 한국 사회는 행복이 낮고 고통이 많으므로 발전할 여지가 많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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