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Review

[마이아트뮤지엄] 루드비히 미술관 컬렉션,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

13.d_dk 2023. 6. 2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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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미술관 컬렉션,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

 미술사와 관련된 책과 미디어를 접하면서 한 번쯤은 직접 역사에 이름이 남은 그림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마침 독일에 있는 역사가 있는 미술관의 작품을 한국에서 전시한다고 하였다. 전시의 제목부터 ‘피카소’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루드비히 미술관 컬렉션,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이다. 강남에 있는 마이아트 뮤지엄에서 진행되었다. 어떤 작품이 있는지 다 찾아보고 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어떤 작품이 있을지 기대가 되는 전시였다. 금요일 오후 반차를 쓰고 체력적으로 조금 힘든 상황에서 관람을 하여 제대로 보았다는 생각은 좀 없지만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그림들이 많았다.

 

역사적인, 거장들의, 많은 작품들을 보며 남기는 생각들

 루드비히 미술관은 쾰른 최초의 현대미술관이라고 한다. 루드비히 부부가 소중히 모았던 수많은 미술품을 기증하면서 미술관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다른 시민들이 가진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작품들이 기증되면서 시민들이 작품을 기증하여 만들어지고 유지된 미술관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하나하나 인상깊었던 작품들을 생각과 함께 정리해보고자 한다.

 Franz marc; cattle; 1913 (프란츠 마르크; 소들)

 색감과 그림으로 보았을 때는 샤갈이 생각났다. 샤갈의 나의 마을에서 나타난 소와 그 색감이 생각났지만 다른 화가였다. 이 화가, 프란츠 마르크는 자연과 동물에서 순수함을 찾아서 그렸다고 한다. 이러한 순수함을 표현하기 위해 강렬한 색채도 그를 대표하는 회화 기법이라고 한다.

 

 Wassily kandinsky; white stroke; 1930 (바실리 칸딘스키; 흰 붓자국)

 추상회화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바실리 킨딘스키의 작품이다. 그림을 보았을 때부터 칸딘스키의 추상이 생각났다. 다른 세계의 무언가를 보고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렸는데 존재하는 것을 보고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칸딘스키의 추상이 주는 매력 같았다.

 

 Willi baumeister; standing figure with blue patch; 1933 (빌리 바우마이스터; 파란 조각과 서 있는 형상)

 칸딘스키와 함께 추상 회화의 한 축으로 불리는 독일 출신의 화가 빌리 바우마이스터의 작품이다. 어렵고 너무 많은 생각이 드는 추상이기보다는 조금 더 아이가 그린 느낌에 가까운 추상이었다. 질감이나 색상들이 합쳐져서 보이는 느낌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wald Matare; sleeping cat; 1929 (에발트 마타레; 잠자는 고양이)

 거의 100년에 가까운 오래된 나무 형상이다. 이때에도 고양이는 고양이 했던 게 분명하다!

 

 Kazimir Malevich; supremus no. 38; 1916 (카지미르 랄레비치; 슈프리무스 38번)

 나는 추상화가로는 칸딘스키만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술사 책에서 접했던 칸딘스키의 추상화와 비슷하여 칸딘스키의 작품인 줄 알았으나, 러시아의 카지미르 랄레비치라는 화가의 작품이었다. 러시아에서 탄압을 받았던 화가이지만 자신의 추상을 굽히지 않고 그림을 그려 불멸로 이름과 작품이 남았다고 한다.

 

 Alexander Rodchenko; spatial construction no. 5; 1918 (알렌산더 로드첸코; 백색의 비구상 조형물)

 알루미늄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물이다. 거의 100년 동안 보존된 알루미늄의 구조물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실제로 작품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큐레이팅된 것처럼 보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핀 조명의 강한 빛으로 인해 복잡한 구조물에서 복잡하고 독특한 형상을 가진 그림자가 보였다. 그 그림자와 함께 있는 조형물이 참 매력적이었다.

 

 Natalia Goncharova; the orange vendor; 1918 (나탈리아 곤차로바; 오렌지 상인)

 오렌지 상인을 그림 그림이다. 왠지 오렌지 상인이 있는 그 시장에 매우 자주 갔었을 것 같다. 자주 가며 보았던 수많은 화려한 모습의 오렌지 상인의 부분 부분을 합쳐서 그린 느낌이 들었다. 하나의 대상과 다른 시간이 합쳐진 그림이었다.

 

 Marc Chagall; portrait of my sister; 1909 (마르크 샤갈; 나의 여동생의 초상화)

 샤갈의 화풍이 보이는 그림이었다. 아직 초현실적인 느낌으로 넘어가기 전인지 초현실의 느낌은 없었다. 샤갈의 화풍인 구분되지만 모호한 느낌의 경계면이 보였던 것 같다.

 

 Georges Braque; pichet, catron, cornpotier; 1928 (조르주 브라크; 유리병, 레몬, 과일 그릇)

 밝은 색상의 정물화였다. 보았던 여러 정물화 중 가장 길쭉하게 그려진(?) 정물화였다. 선으로 강조된 물체라기보다는 옅고 밝은 색으로 강조된 것 같은 느낌의 정물화라서 기억에 남았다.

 

 Pablo Picasso; glass and cup; 1910 (파블로 피카소; 유리와 컵)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이다. 제목에 있는 물체를 찾을 수 있지만 무언가 깨진듯한 그림이 있다. 대상을 하나하나 쪼개어 해체해서 보는 파블로 피카소의 화풍을 그대로 볼 수 있다.

 

 Pablo Picasso; mandolin, fruit bowl, marble fist; 1925 (파블로 피카소; 만돌린, 과일 그릇, 대리석 주먹)

 생각보다 정물화 같은 느낌의 그림이다. 어떤 것은 강하게 선을 가지지만 어떤 것은 긁어낸듯한 느낌으로 선이 있는 게 재미있었다.

 

 Pablo Picasso; in the studio; 1964 (파블로 피카소; 작업실에서)

 사람의 얼굴을 볼 수는 있지만 그 얼굴을 보려고 할 때 해체된 많은 것들을 계속 상상하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본인의 모습인 것 같지만 해체된 것은 어떤 것을 해체하여 그린 것일까? 해체되었다는 생각에 갇혀 다른 것을 못 보고 있는 것일까? 많은 재미있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Pable Piccaso; woman with an artichoke; 1941 (파블로 피카소; 아티초크를 든 여인)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는(?) 그림이었다. 분해된 형상도 형상이지만 생각보다 꽤 큰 그림에 압도당했다. 작은 크기의 그림이 해체된 느낌과 큰 그림이 해체된 느낌은 사뭇 달랐다.

 

 Jackson Pollock; black and white no. 15; 1951 (잭슨 폴록; 흑과 백 15번)

 미국의 유명한 화가 잭슨 폴록의 그림이다.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에서 보았던 그림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마구잡이로 뿌려진 것 같은 물감들이지만 힘이 느껴졌다. 물감을 퍼트리는 붓질 하나하나 힘의 강약이 있었을 것 같았다.

 

 Ernst Wilhelm Nay; in rosy rhythms; 1951 (에른스트 빌헬름 나이; 장밋빛 리듬 안에서)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제목 그대로 장밋빛이 보이고 리듬도 느껴졌다. 그림을 먼저 그리고 제목을 짓지는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제목이 그림을 너무 잘 설명해서 기분이 좋은 그림이었다.

 

 Richard Hamilton; swingeing london 67-2; 1968 (리처드 해밀턴; 스윈징 런던 67-2)

 사진기의 플래시가 터지는 느낌이 드는 그림이다. 하지만 사진이 아닌 그림이다. 실크스크린을 이용하여 찍어낸 그림이었다. 찍어낸 그림이다 보니 색상들의 점이 손으로도 그리고 사진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표현이 나온다. 그 부분이 잘 담긴 그림인 것 같아서 기억에 남았다.

 

 1900년대에 유명한 화가들의 다양한 화풍의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퇴근시간에 지친 상태로 보아서 아쉬웠지만 지친 상태에서도 사람을 매료시키는 그림들이 많았다. 이름이 있는 역사에 남은 그림들을 실제로 본다는 것은 꽤 재미있는 충격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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